서울대학교 용두동 캠퍼스

1호선 제기동역을 나서서 선농단으로 향하는 길 초입에 들어서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터'라는 문구가 적힌 표지석이 등장한다. 서울대학교 로고와 함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 1954년 12월부터 1975년 2월까지 이 곳에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 있던 서울대학교 용두동 캠퍼스는 1975년까지 용두동 138-61번지에 머물렀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은 해방 후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가 국립 서울대학교로 통합 개편되면서 만들어졌다. 사범대학 발족 당시 교사는 서울시 중구 을지로 5가 40번지에 위치했다. 그러나 6.25 전쟁 후 부산 피난 시절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면서 용두동 교사로 이전하였고 1975년 이전까지 이 자리를 지켰다.

용두동에 있던 사범대학의 명소는 사범대 뒷동산이라고 불렸던 ‘청량대’였다. 합동 연구실 뒤편 동산 한 가운데에 이곳의 공기와 바람이 청량함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어서 동산 전체를 청량대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후 ‘청량’은 사범대학의 대명사 구실을 하게 되었다. 사범대학의 축제와 교지에도 ‘청량’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청량대에는 조선시대에 임금이 씨를 뿌리고 밭을 갈았다는 선농단 유적이 있어서 역사적 운치까지 더하였다.

사범대학생들이 사랑한 청량대의 정취는 다음과 같이 <대학신문>에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하늘을, 바람을, 낭만을 호흡한다. 휴게실을 갖지 못한 학생들은 여기서 다정한 벗들과 담소하고, 신문지에 그린 장기판을 벌리고, 책을 읽고 도시락을 펼친다. 잔디밭에 누워 트랜지스터를 듣고, 혼곤히 젖어드는 오수에 등을 기대면 깜빡 강의시간을 놓쳐버리는 삼매경도 있다. 청량대는 개나리 필 때가 한창이다. 해묵은 측백나무 사이로 시야가 노오란 개나리꽃에 파묻힐 무렵이면 청량대는 철을 만난 피서지처럼 원색의 짙은 빛깔로 꾸며진다. 소근거리는 여학생들의 상기한 귀밑과 호탕하게 떠들어대는 남학생들의 웃음소리에 청량대는 언제나 활기에 넘친다. 그 옛날 지존의 왕이 친히 백성들의 농사짓는 것을 바라보았다는 유래를 지니고 있는 곳. 그러나 지금은 기와집이 총총하게 엎드려 있는 도시의 일각. 경춘선을 달리는 디젤차의 기적이 한가로이 퍼지기도 한다. 휴지가 멋대로 버려진 청량대. 그러나 사대생은 청량대를 빼놓고 대학생활을 말할 수 없으리라." (<대학신문>, 1961.4.27.) (출처: 서울대학교 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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